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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이 세대와 구별되는 청장년

청장년선교회 전국연합회
감리교역사

이 세대와 구별되는 청장년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아닌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레위기 20:26)


한국에 기독교가 소개되기는 17세기 중엽에 시작되었는데 그 후부터는 여러 교파에 소속한 용감한 선교사들이 모험적으로 한국 연해와 내륙에 왕래하면서 비밀로 복음을 전파한 일이 있다.

 
 

한국에 기독교가 소개되기는 17세기 중엽에 시작되었는데 그 후부터는 여러 교파에 소속한 용감한 선교사들이 모험적으로 한국 연해와 내륙에 왕래하면서 비밀로 복음을 전파한 일이 있다. 그러나 이땅에 감리교회가 공식적으로 첫 발을 내디딘 것은 일본에서 일하던 미국 감리교회 소속 선교사 맥클레이 박사의 내한이었다.
맥클레이 목사는 당시 고종폐하에 드리는 공한을 가져 왔는데 이 공한은 기독교 선교를 탄원하는 내용이었다. 주한 미국 공사인 푸트와 외무협판인 김옥균을 통해 봉정된 이 서신을 고종에게 전달되었고 7월 3일에 교육과 의료사업에 대한 허락을 받아내었다.
이 허가를 받아 내기까지는 존 가우쳐(REV. JOHN FRANKLIN GOUCHER, 1845~1922) 박사의 노력에 좋은 영향을 받아 그 뜻이 일본주재 감리회 선교 책임자인 맥클레이 목사에게 감동을 주어 1884년 6월 19일 부인을 동반하고 일본 나가사끼를 떠나 한국으로 향하였다. 떠나오기 까지는 한국에서 일본에 왕래하는 유람단이나 유학생과 망명객들을 사귀게 되었는데 특히 김옥균과 알게 되었던 것이 한국 방문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이미 김옥균에게 서신을 통하여 한국 방문의 목적을 연락하였다는 것이다. 맥클레이 목사는 1884년 6월 23일 인천에 도착하여 다음 날인 24일 서울에 들어와 공사관에 체류하여 고종으로부터 윤허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미국 뉴욕에 있는 선교본부에 보고하였다. 한국에서 교육선교사업을 시작하자고 주장하던 가우쳐 박사는 그 당시 물심양면으로 원조를 하여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인천(당시 제물포)에 봄비를 맞으며 아펜젤러 목사부부와 스크랜톤 의사 부부, 그리고동시에 동행한 스크랜톤 의사의 자당 스크랜톤 부인이 미 감리교회를 대표하여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로 도착하였다.
맥클레이 목사는 미공사관 근처 약간 높은 지대와 그가 머물렀던 가옥의 매입계약을 푸트공사에게 약속받고 7월 8일 추구하였다. 한편 미국의 남감리회도 1885년 10월부터 한국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 때의 사역자들은 핸드릭 감독과 중국에서 활동하던 리드 박사였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에 오게 된 것은 이보다 앞서 상해에서 남감리교인이 된(1887. 7. 4) 윤치호씨의 헌신적인 노력때문이었다. 남감리교회도 여성운동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 2년 후에 켐멜부인을 파송했다.



 
 

첫 한국 선교사 회의는 1885년 4월 5일 일본 동경 아오야마에서 모였다. 이곳은 맥클레이 사택으로서 감리교 일본 선교부이기도 하다. 맥클레이 목사의 사회로 모인 첫 선교사회의는 아펜젤러 부부와 스크랜톤 부부, 스크랜톤의 모친인 메리 스크랜톤여사, 그리고 이수정과 박영효가 참여하였다. 시편 121편과 122편을 읽고 찬송 547장을 불렀다.
그 후 맥클레이 목사의 한국 방문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오후 2시 45분에 속개된 회의에서 1885년말까지 동경의 영화 학교에 재학하는 4명의 한국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200불을 지급하기로 했다. 또한 감리교 교리문답을 한국어로 번역하였고 이수정씨가 「진도학습」도 번역하였다. 소문서와 찬송가의 번역 출판비를 학교기금에서 250불을 지불키로 결의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 지도자 인재양성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들을 통해 기독교 문서들이 한글로 번역 출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1회 한국 선교회는 1895년 8월 17일 아펜젤러를 회장으로 정동 예배처에서 모였다. 이 때는 이미 스크랜톤에 의해 정동병원이 시작되었고, 아펜젤러의 배재학당(1885. 8. 3시작)이 시작되었다. 또한 정동예배처도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적극 선교해 나갈 것을 결의 하였다.
일본에 있는 세 한국인을 장래 한국 감리교회와 사회 지도자로 양성키 위해 장학금을 지불키로 하고 가난하고 버려진 환자들, 민중에게 찾아 나가는 교회와 선교가 되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이러한 적극 선교에 의해서 제2회 한국선교회 때에는(1886. 6. 10)세례인 1명, 원입교인 100명, 주일학교 1개교, 학생 12명, 학교 1개교에 학생 30명, 병원 1, 고아원과 서점이 1개씩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1년 동안 1000종류에 40,000페이지를 인쇄하여 전도하였다고 한다.



 
 

한편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외국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고, 중국과 일본을 통해 독자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어 전도자가 되는가 하면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한국선교의 귀중한 기반을 닦아 놓은 복음의 사역자들이 있었다.
한국인으로 첫 신앙을 고백한 이는 한용경씨이다. 한씨는 외무부에서 영어를 배웠던 분인데 미국에서 온 아펜젤러가 영어를 가르친다고 듣고 스크랜톤의 어학교사로 있으면서 아펜젤러에게 영어를 배운 분이기도 하다. 이러는 동안에 선교사들의 습관과 품행을 관찰하게 되었고 그들의 신앙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씨는 스크랜톤 박사에게 신약성경을 받아 공부하였고 아펜젤러에게 신도독본을 받아 공부하였다. 한용경씨는 규칙적인 기도회에 참여하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결심하고 스스로 아펜젤러를 찾아가 신앙고백을 하였다. 이러다가 1887년 2월 13일 주일 저녁에 아펜젤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일기는 썼다.

"학생 하나가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한용경이다. 그는 지난 가을 한문 성서를 보고 관심을 갖게 되어 지난 두 주간 주일저녁에 어두워진 후에도 빛을 찾으러왔다. 그와 다른 이들에게도 빛이 하루 빨리 비추이기를 기도한다."

한용경씨는 10월 2일 저녁에 가서야 세례를 받게 되는데 이 때 아펜젤러는 한글로 번역된 세례 예식서로 한국말로 세례를 베풀었다. 이것이 첫 한글과 한국말로 베풀어진 세례식이었다. 그 후 한용경씨는 정동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스크랜톤의 통역을 돕고 각처의 진료소를 찾아다니며 말씀을 가르치고 전도하는 한국인 전도인이 되었다. 한용경씨는 최초 정동교회의 권사였다. 한편 첫 한국인 목사가 된 최병헌씨는 과거를 보기 위해 왔다가 탐관오리들의 부패상을 보고 심히 격분하여 낙담하였다. 이때 배재학당에 다니던 윤치호씨가 최병헌을 죤스선교사의 한국어 교사로 소개하였다. 궁여지책으로 최병헌은 1889년부터 배재학당의 한문교사로 봉직케 되었다.
최병헌의 회심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것에서 일어났다. 어느날 서대문 거리를 지나다가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다. 최선생도 측은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냥 지나쳐 갔다. 그런데 선교사가 그 병든 거지를 보더니 들것에 들고 병원으로 데려 갔고 목욕시켜 깨끗한침상에 누이며 치료해 주는 것에서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1893년 2월 8일에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감리교회는 최초의 개신교 목사(김창식, 김기범)을 배출하여 한국교회의 자치능력을 신속히 키워나갔다. 한국에서의 두 감리교는 서로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같이 발전하며 여러 기관을 협동 경영하는 동시에 각각 맡은 지방을 교화 시키기에 노력하였다.
1927년에 와서는 이 두 교회 사이가 점점 농후하게 된 조화적 정신과 우의적 태도가 두 연회로 하여금 연합하여 각각 그 총회에 "한국에 있는 두 연회를 합동시키어 자치하는 한국감리교회를 조직할 것과 전권위원을 파견하여 그 임무를 다 하도록 하여 주시기"를 이룩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감리교회는 일제의 포악한 정치세력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일본 기독교단에 강제 병합되는 수치를 겪어야 했으며, 해방 후 "기도교 대한 감리회"로 개명되었다.



 
 

1924년 미감리회 조선 연회에서 교회 진흥연구위원회의 배영식씨는 사경회에서 공부하는 외에 과목을 지시하여 가정에서 연장보충하는 공부하는 데에 힘쓰도록 등급사경회의 과정을 개편 보고함으로써 평신도 성서 연구에 기초를 이루었다. 그에 앞서 1887년 5월 5일 엡윗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이는 미국교회보다 8년 뒤였다.
당시 미감리회 조이스 감독은 존스 목사를 감리회관(총무)으로 임명했다. 앞으로 창립할 엡윗청년회를 의해서 엡위연합위원을 선택했다. 엡윗 청년회가 조직된 교회는 정동제일교회였다. 뒤어 1897년 10월31일에 조직했는데 회원은 남자 25명, 여자 11명이었다. 부서는 전도국, 학무국, 통신국, 회계국 등 6개국을 두었으며 회원 연령은 15에서 40세까지였다.
이 청년회는 낙망과 방황의 기로에 서 있는 젊은이들로 새 희망과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는 운동을 일으키는 일에 공헌했다. 또한 주일학교 본부로 불러오던 연회의 주일학교 위원을 1926년에 종교교육위원이라 개칭하고 전국 미감리회 14지방에 설치해 있는 주일학교 협회를 연합하여 종교교육협의회로 조직했다. 총무는 레시요한 목사였다. 그리고 노물 부인은 1915년 경성 유년 주일학교 사무원회를 창립하여 1927년까지 운영했던 것을 서울 시내 각 교회의 주일학교 사무원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여 주일학교 문제점들을 제외하고 연구 검토하였다.



 
 

기독교 대한 감리회는 초기부터 웨슬리의 복음주의에 입각한 신앙 부흥운동 사회적 성결의 정신에 기반한 사회적 종교로서의 사명후생, 그리고 한국인의 주체성에 신념을 둔 신학의 토착화 운동에 헌신함으러써 기독교 신앙의 전통적 실천을 확실히 해 왔다.
대체적으로 감리교회가 한국에 들어 왔을때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성년 교육이 우선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시작되었다. 한국인 전도자를 통하여 믿기로 시작한 이들이 있다는 보고를 받으면 선교사들은 그 곳에 찾아가 사랑방에 머무르면서 신앙훈련과 성경, 그리고 세례문답을 가르쳤다.
이렇게 각처에서 청함을 받아 "사랑방 교육"으로 시작된 것이 교회로 성장하면서 성년 교육은 사경회와 장년주일학교로 발전된 것이다. 주일 예배 한 시간 전에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고 누구나 참석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노래와 성경이야기를 가르치는 모임이 시작되었다. 이건것이 주일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1886년에 정동주일학교에 이어 1888년에 이화주일학교로 시작되어 갔지만 주일학교를 주일학교 답게 조직되어 운영된 것은 1903년 평양 남사현교회주일학교라 하겠다. 이렇게 발전한 주일학교는 1915년부터가 교회가 설립되는 곳이면 반드시 주일학교가 운영되어지게 되었다.
1907년 하리영의 부흥운동, 1901~1993년의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 1974년 5천교회 100만신도 부흥운동 그리고 1875~1914년 전덕기 목사의 민족운동, 1930년대의 최용신의 농촌계몽운동 3.1운동, 1970년대의 인권운동과 산업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하나 둘씩 그 기반을 닦아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압제 밑에서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고 그 곳에서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지키지 못한 것은 그러한 노력들의 유산을 지키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해방이후 민족국가 건설과 통일에 적극적으로 참여치 못하고 반민주적 정치권력에 복종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러한 혼란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조차도 여러차례 내적 분열의 수치와 아픔을 치루어야 했으나 하나되고 온전케 하시는 치유자, 성령의 능력은 우리의 죄악의 세력을 이기시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치성을 회복해 오셨다. 이제 민족의 수난을 짊어지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추구하기에 힘쓰던 감리교회의 통전적 신앙유산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이 나라의 복음화, 민족의 통일, 그리고 세계의 평화와 창조질서의 보전에 전력을 기울이고 선배들의 신앙과 선교 사명을 이어받아 700교회 200만 신도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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