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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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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의 유래
미국 감리교의 역사
미국 감리교회의 한국선교
1738년 5월 24일 저녁, 영국 런던의 올더스게잇 조그만 집회에 참석했다가 뜨거운 신생(新生)의 체험을 한 웨슬리(John Wesley)의 고백이 그것이다. 웨슬리는 그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신앙 각성운동을 전개하였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그 운동은 감리교(Methodist)운동으로 불려져 오늘의 세계 3대 개신교의 하나로 감리교회가 자리잡게 되는 역사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상하게 내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 믿어야 함을 느꼈다. 그리고는 내 모든 죄가 사라지고 나같은 죄인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속함을 받았다는 확신이 생겼다."
감리교의 역사는 위의 고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영국 런던의 올더스게잇 조그만 집회에 참석했다가 뜨거운 신생(新生)의 체험을 한 웨슬리(John Wesley)의 고백이 그것이다. 웨슬리는 그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신앙 각성운동을 전개하였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그 운동은 감리교(Methodist)운동으로 불려져 오늘의 세계 3대 개신교의 하나로 감리교회가 자리잡게 되는 역사를 이루게 된 것이다.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의 전통있는 성직자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는 3대째 성공회 사제였다. 그가 엡워드(Epworth)에서 출생했을 때 부친은 그곳 사제로 봉직하던 중이었다. 그의 어머니 수산나의 경건주의 신앙은 어린 그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엄격한 신앙훈련, 규칙적인 생활은 어머니에게서 받은 영향이었다. 그가 가족의 전통을 이어 동생(Charles)과 함께 옥스퍼드 대학생들로 1729년 11월 '신성구락부'(Holy Club)을 만들어 규칙적이고 엄격한 신앙훈련을 추구한것도 그러한 신앙의 연장이었다. 그들의 엄격한 규칙생할을 보고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별명처럼 붙여준 칭호, '메도디스트(Methodist : 규칙주의자란 뜻으로 '융통성이 없는 자들'이란 비난의 의미도 담겨 있다)가 결국 교회명칭이 되었다. '메도디스트'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감리교'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감리교의 결정적 출발은 1738년의 중생 체험에 있었지만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729년의 신성구락부에까지 소급할 수 있고 또다시 웨슬리 가문의 철저한 경건주의 신앙전통을 세운 어머니 수산나의 신앙까지 언급할 수 있다.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1729년 성공회 사제가 된 후 아버지가 목회하던 엡워드에서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동생과 함께 미국 대륙 인디언 선교사로 가게 된 것도 어려서부터 받아온 경건주의적 신앙 열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1736년 미국 조지아에 도착하여 인디언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펴고자 했으나 당시 상황은 그에게 불리하기만 했다. 영국 정부와 식민지 정부 사이에 마찰이 야기되고 있었고 조지아의 백인들은 웨슬리의 금욕주의적 신앙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는 결국 2년만에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영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것은 실패와 좌절의 체험이었다. 나름대로 엄격하고 규칙적인 신앙생활을 추구하며 도덕적 선을 이루려 노력했던 그였기에 선교 실패의 체험은 깊은 좌절을 맛보게 하였다.
그러나 미국행이 전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였다. 자신의 의지적 노력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다는 점에서 값진 체험을 한 것이다. 의지적 노력으로 선을 추구하면서 율법주의적인 규칙적 금욕생활로 구원을 성취하려 했던 신앙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바로 이같은 한계 인식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라는 개신교의 보편적 구원 체험의 전제였다는 점에서 웨슬리의 프로테스탄트적 회심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또 한가지 미국여행에서 얻은 소득이 있다면 모라비안(Moravin)교도들과의 만남을 꼽을 수 있다. 모라비안교도란 14세기 유럽의 보헴아 지방에서 형성된 반(反)카톨릭적 신앙 공동체에서 비롯된 교파로 모라비아 지방에서 성행하다가 17세기 대륙에서 추방되어 그 중 일부가 영국에까지 건너와 독자적인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던 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이 규정한 최소한의 직제만 인정할뿐 카톨릭교회의 복잡한 교회조직은 부인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개신교회 보편적 구원론을 갖고 있었으며 공동체 생활을 통해 신앙적 결속을 다졌다. 모라비안교도는 루터의 종교개혁(1517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영국에서도 종교개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웨슬리는 미국으로 여행하던 중 모라비안 교도들이 심한 풍랑중에도 동요하지 않고 평화롭게 예배드리는 모습에서 우선 깊은 감명을 받았고 조지아에 가서도 그곳 모라비안 지도자 볼러(P.Bohier)와 가깝게 지내면서 모라비안 교도들의 신앙에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 그가 회심한 체험한 직후 모라비안교도들의 신앙에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 그가 회심을 체험한 직후 모라비안교도들의 중심지인 헤른후트를 방문한 것도 모라비안 교도 신앙이 그에게 끼친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새로운 신앙각성 운동으로 시작된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은 처음부터 별개의 교파를 만들고자 한것이 아니였다. 웨슬리가 소속된 영국 성공회 범주 안에서 성서적 신앙 운동으로 추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영국 성공회는 이 신앙운동을 흡수할 만한 개방적 자세가 되어있지 못했다. 권의주의적이고 제도적인 성공회는 웨슬리의 신앙운동을 경계하며 교회 제도권밖으로 내몰았다. 성공회 교회 안에서 선교를 하지 못하게 했음은 물론이고 각 교구마다 그의 출입을 금지 하였다. 이에 웨슬리의 유명한 "세계가 나의 교구다" (The world is my parish)라는 선언이 나오게 된것이다.
초기엔 주로 탄광촌, 농어촌, 같은 소외된 지역을 순회하며 옥외 전도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웨슬리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로 브리스톨, 킹스우드, 바드 페터레인, 런던 등지에 별도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 모임에 '감리교회'란 칭호가 붙여진 것은 1740년 7월 24일 '런던감리교회'(The Methodist Society in London)가 처음이었다.
초기 감리교 공동체 '신앙의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속회활동이었다. 웨슬리는 각 지역에 있는 감리교인들의 싱앙훈련 및 지도를 위해 교회마다 반회<(斑會)Band>를 조직했다. 남?녀로 나누어 남자반, 여자반을 지도하였다.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 서로간의 영적 신앙상태를 점검하고 교인간의 어려운 형편을 돕게 하려는 것이 반회의 목적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교인수가 늘고 웨슬리가 직접 반회를 지도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좀더 확대된 형태의 속회(屬會, Class Meeting)가 조직되었다.

1742년 브리스틀에서 처음 시도된 속회는 10~12명의 교인들로 구성되었으며 각 속회마다 속장(屬長, Class Leader)을 두어 속회를 인도하였다. 속장은 매주 1회 모이는 속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는 외에 속회 때마다 1인당 1페니씩 내는 헌금을 모아 구제사업과 복음전도 사업에 쓰는 일을 맡아 하였다. 그리고 매 3개월마다 한번씩 속장과 교인들이 함께 모여 집회를 가졌는데 첫째날 저녁엔 남자, 둘째날 저녁엔 여자 집회가 각각 열리고 셋째날엔 함께 모여 예찬식(Love Feast : Agape)으로 불리는 만찬을 나누었다.
신앙훈련과 성도간의 교제를 목적으로 한 이 예찬식은 동방정교회와 모라비안교도들 사이에 전통의식으로 전해오던 것으로 웨슬리도 이 전통을 받아들여 실시하였던 것이다. 빵과 음료수를 나누며 찬양과 기도, 권면의 설교로 이루어지는 이 의식도 초기 감리교 신앙공동체의 특징중 하나였다. 이처럼 매 3개월마다 한번씩 1년에 네 차례 모이는 규모가 커지면서 구역별로 속장들이나 권사(勸士, Exhorter), 전도사들이 대표로 모이는 모임으로 변하였고 교회의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는 의결기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 모임을 구역회(區域會, Circuit Meeting)혹은 계삭회(季朔會, Quarterly Meeting)로 불리었다.
매 계삭(3개월)마다 모였다 해서 계삭회라 하였다. 이 구역회(혹은 계삭회) 대표들이 1년에 한 차례씩 지방별로 모인 것이 지방회(地方會, District Conference)이다. 그리고 지방회 대표들이 역시 1년에 한차례씩 모인 것이 연회(年會, Annual Conference)로 ㅇㄴ회가 감리교회의 실질적인 최고 의결기구이다. 첫 감리교 연회가 소집된 것은 1744년 6월 25일 런던이었는데 이때 감리교회의 기본적 교리와 장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연회이상의 조직으로 총회(總會, General Congerence)가 있으나 이것은 미국 감리교회에서 생겨난 것으로 연회간의 사무협조를 목적으로 한 협의기구 성격이 강하다.
마지막으로 초기 감리교의 제도적 특징의 하나를 더 든다면 평신도의 역활이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속회도 평신도 중심으로 구성 유지되었을 뿐 아니라 평신도에게 설교권을 과감하게 부여하였다. 감리교 특유의 평신도 직책인 '권사'는 '권면'하는 자격, 즉 설교권을 과감하게 부여된 직책이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권사는 성경을 해석하여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들이었다. 또 다른 감리교 특유의 직책인 전도사(Preacher)도 본래 평신도 중에서 교인들의 신앙을 전담하여 지도하는 목회자에게 붙여주었던 칭호였다. 다시 이들 전도사는 한 곳에 정착해 시무하는 본처 전도사(本妻傳道師, Local Preacher)와 이곳 저곳 순회하며 시무하는 순행전도사(巡行傳道師, Itinerating Peracher)로 나뉘는데 오늘에 와서 본처전도사는 '장로(長老, Elder)란 말로 바뀌었다. 이들 전도사는 안수받은 목사(牧師, Pastor)와는 성례(성만찬과 세례의식)를 집행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감리교가 평신도의 비중을 높게 두는 전통은 모든의회 대표를 선출할 때 성직자와 같은 수로 평신도 대표를 선출하는 규정에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신생에 대한 웨슬리의 뜨거운 체험에서 시작된 감리교회 운동은 영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확산되어 나갔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영국 런던의 올더스게잇 조그만 집회에 참석했다가 뜨거운 신생(新生)의 체험을 한 웨슬리(John Wesley)의 고백이 그것이다. 웨슬리는 그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신앙 각성운동을 전개하였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그 운동은 감리교(Methodist)운동으로 불려져 오늘의 세계 3대 개신교의 하나로 감리교회가 자리잡게 되는 역사를 이루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 감리교회가 유입된 경로는 감리교 발상지인 영국에서 직접 건너온 것이 아니라 미국을 거쳐 들어온 간접 통로였다. 따라서 미국 감리교회의 역사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미국 대륙에 감리교가 최초로 전파된 것은 미국 독립전쟁(1777년) 훨씬 전의 일로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로 있을 때였다. 이미 1763년 이전에 아일랜드 출신의 감리교인 스트로브릿지(R.Stawbridge)가 뉴욕 근방 메릴랜드에 정착하여 버지니아. 펜실베니아 지방에 전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초기 미국의 감리교 선교는 이처럼 식민지 개척을 위해 이주한 감리교 평신도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스트로브릿지 외에 윌리엄즈(R. Williams), 제이렛(D. Jarratto) 등의 이름이 초기 전도인으로 거론되고 있다.
미국에 감리교회란 명칭으로 신앙공동체가 창설된 것은 1767년 뉴욕에서 처음 이루어졌는데 아일랜드 출신 평신도 전도인 엠버리(P. Embury), 영국군 군종사제였다가 웨슬리를 통해 감리교로 개종한 웹(T. Webb) 목사가 주동인물이었다. 이후 필라델피아. 롱아일랜드. 델라웨어. 뉴저지 등에 계속해서 감리교회가 설립되었으며 영국 감리교회도 관심을 갖고 식민지 교회를 지원하게 되었다. 즉 웨슬리 1769년에 보드먼(R. Boardman). 필모어(J. Rilmore)를 정식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계속해서 애즈버리(F. Asbury), 라이트(R. Wright), 랭틴(T. Rankin), 쉐퍼드(G. Shadford)등을 파송해 1770년대에 이르러 미국 감리교회는 숫자적으로도 크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독립전쟁 발발로 감리교 선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미국에서 활약하던 선교사들은 본국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과 식민지(미국)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나뉘었다. 웨슬리가 파송했던 선교사들 중에 애즈버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귀국했다. 본국 정부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혼자 남은 애즈버리는 식민지 미국인들의 입장을 지지하며 전쟁 중에도 꾸준히 선교활동을 벌여 델라웨어를 중심으로 감리교회를 육성하려 노력하였다. 애즈버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감리교 전통이 영국 감리교회 전통과 민족의식에 있어 차이가 있을 것은 자명했다. 애즈버리가 '미국 감리교회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웨슬리의 영국 감리교회는 미국 감리교회와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고자 노력했다. 1784년 웨슬리는 코크(T. Coke), 크레이튼(J. Greighton), 위트코트(R. Wgatooat), 베이시(T. Vasery)등을 목사로 안수하여(이것이 감리교회 최초의 목사 안수였다) 미국에 파송했다. 미국에 있던 애즈버리도 코크에게 안수받아 비로소 목사가 되었다. 미국 감리교인들과 영국 선교사들 사이에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화해 분위기 속에 1784년 12월 24일, 볼티모어 러블리 레인 교회에서 역사적인 미국 감리교회연회가 열렸다. '크리스마스연회'(Christmas-Conference)로도 불리는 이 모임이 미국 감리교회의 공식적 출발을 알린 사건이었다. 이 연회에서 교회 명칭을 "The Methodist Church"와 다른 감독제(Episcopalism)를 채택한 '독립적' 교회로 성격을 분명히 했다. 이로써 미국 감리교회가 정식 출범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목잡하고 다양한 민족?문화적 배경을 갖고 형성된 국가였기에 내부적 갈등 요인이 상존해 있었듯 교회 안에서 그러한 갈등 요인들이 내재하고 있었다. 미국 감리교회도 창설된지 오래지 않아 대표적 지도자 애즈버리, 코크사이의 정치적 견해 차이, 감리교회의 제도와 정치에 대한 평신도 계층의 불만, 민족적 배경이 다른데서 오는 신앙 유형의 차이 등으로 해서 애즈버리와 코크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과 갈등이 치명적인 적이어서 1789년 영국교회 내지는 영국 감리교회에 쏠리는 경향을 보였던 코크 계열이 미국 프로테스탄트 감독교회(The Protestant Eposcopal Church)를 설립하고 나갔다.

이같은 초기 분열을 겪은 후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뱅스(N. Bangs), 피스크(W. FIe), 러터(M. Ruter)등 애즈버리 후계자들에 의해 복음전도 운동이 전개되어 감리교회가 미국 전역에 확산되었고 해외 선교도 적극 추진하여 아프리카(1833), 남아메리카(1836년), 중국(1847년), 인도(1856년)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 감리교회는 남북전쟁(1861~65년)을 계기로 또 한차례 분열을 경험하였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노예문제를 빌미로 일어난 것이지만 북부와 남부 사이의 뿌리깊은 민족적 불신과 갈등, 사회?경제?정치적 구조의 차이 등이 실질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전반적인 사회.정치구조가 남북으로 나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계도 그러한 분열을 겪었다. 미국 감리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남?북 감리교회의 분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미국 감리교회의 남?북 분열은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17년 전에 이미 이루어졌다. 이같은 사실은 남?북 교회 분열이 단순한 노예제도에 대한 찬.반 입장 차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대목이다. 1830년대 미국 감리교회 안에서 웨슬리의 교리, 특히 그리수도인의 완전에 대한 교회 해석이 새롭게 제기되면서 교회제도 혁신 문제까지 거론되었는데 다소 진보적인 북부교회와 보수적인 남부교회 사이에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예제도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북부입장과 찬성하는 남부 입장으로 나뉘게 되었다.

1844년 총회가 열렸을 때 노예제도 문제는 예민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볼티모어 연회를 필두로 북부 교회들은 노예를 갖고 있는 회원들의 교직을 박탈하자는 건의안을 제출해 117대 56으로 통과시켰다. 다수의 힘으로 남부 지도자들을 눌렀던 것이다. 그때 오하이오, 켄터키, 미주리 등 남부 지역을 관찰하고 있던 잰드루(J. O. Andrew)감독이 노예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앤드루 감독에게는 재혼한 부인이 소유하고 있던 흑인 노예가 있었던 것이다. 앤드루 감독 자신은 노예해방을 추구했으나 그가 살고 있는 조지아주 법이 노예해방을 금하고 있었기에 법률상 앤드루감독 소유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총회 중에 이 사실이 공표되고 북부 지도자들은 또다시 힘을빌어 앤드루 감독의 감독직 사임을 요구하였다. 이에 남부지역 대표들이 총회를 거부하고 별도의 조직을 갖추었으니 1846년 미국 남감리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가 버지니아에서 개최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미국 감리교회가 남.북으로 나뉘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남감리회', '북감리회'로 불리었고 북감리회의 경우엔 '미감리회(美監理會)란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다. 이후 1939년에 두 교회가 합하여 미국 연합감리회(The United Methodist Church)를 이루기까지 95년동안 나뉘어 교회 정치와 선교를 추구하였다. 따라서 해외 선교도 두 감리교회가 별도로 추진했으니 이러써 한 나라에 두개의 감리교회가 들어가 선교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그런 경우에 해당하였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영국 런던의 올더스게잇 조그만 집회에 참석했다가 뜨거운 신생(新生)의 체험을 한 웨슬리(John Wesley)의 고백이 그것이다. 웨슬리는 그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신앙 각성운동을 전개하였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그 운동은 감리교(Methodist)운동으로 불려져 오늘의 세계 3대 개신교의 하나로 감리교회가 자리잡게 되는 역사를 이루게 된 것이다.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에 특기할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전에 이미 한국인 전도인들에 의해 복음이 수용되고 전파되어 상당수의 교인들이 생겨난 상태에서 외국인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인들의 적극적이고도 주체적인 복음 수용태도를 밝혀주는 대목이다. 한국인들은 적극적인 자세로 복음을 받아들였고 자진해서 전파하였기에 비교적 짧은 기간안에 기독교는 한국인의 종교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감리교 선교도 마찬가지 경로를 거쳐 이루어졌다. 미국 감리교외 중에 미감리회, 즉 북감리회가 우리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키로 결정한 것이 1884년이었고 그 첫 선교사들로 아펜젤러(H. G. Appenseller), 스크랜튼(W. B. Scranton)내외, 스크랜튼(M. F. Scranton) 대부인이 선발되어 내한한 것이 1885년이지만 이같은 미감리회의 한국 선교는 여러 경로를 통해 전달된 한국인들의 선교사 파송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대체로 세가지 통로로 한국인들이 선교 요청이 서방(미국)에 전달되었다.
첫째는 1870년 중반부터 만주 선교를 시작한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을 통해 전달되었다. 로스(J. Ross), 매킨타이어(J. Mclntyre) 등은 스코틀랜드연합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만주 영구?봉천에 자리잡고 선교하던 중 의주에서 건너온 한국인들을 만나게 되어 한국인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주에도 로스는 이웅찬, 백홍준, 최성균, 김진기, 이성하, 서상륜 등 한국인들의 힘을 빌어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1882년에 최초의 우리말 성경인「예수셩교 누가복음」「예수셩교 요안내복음」을 인쇄해 냈고 1887년 신약 전체를 번역해 「예수셩교전셔」란 이름으로 인쇄했다. 이 성경들은 서상륜, 백홍준, 최성균, 이성하 등 전도인들에 의해 국내에 밀반입되었고 그것을 읽은 한국인들 중에 기독교 개종을 결심하고 세례받기를 원하는 자들이 생겨났으니 세상륜의 보고에 의하면 적어도 1884년 말에 국내에만 170여명의 세례지원자들이 있었다. 그중에 의주, 소래지방에는 사상륜, 백홍준등이 지도하는 비밀집회까지 열리고 있었다. 이같은 사실은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은 통해 서방세계에 알려졌고 '어서 들어와 세례를 베풀어 달라'는 한국인들의 요청도 함께 전달되었다.
이후 별도로 거의 같은 무렵에 일본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1882년 고종의 후의를 입고 일본에 유학했던 이수정이 일본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역시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처음엔 정치나 농업관계 학문을 배우려고 갔던 그는 일본인 농학자이자 기독교인인 츠다센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1883년 4월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미국성서공회 일본지부 총무인 루이스(H. Loomis)의 도움을 받아 이수정은 1884년에 이두(吏讀) 토를 단 한문 성경의 형태로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편찬했고 1885년 초에는 순 한글로 누가복음을 번역하여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일본에서 인쇄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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