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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이 세대와 구별되는 청장년

청장년선교회 전국연합회
선교역사

이 세대와 구별되는 청장년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아닌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레위기 20:26)


전체
감리교의 유래
미국 감리교의 역사
미국 감리교회의 한국선교
1738년 5월 24일 저녁, 영국 런던의 올더스게잇 조그만 집회에 참석했다가 뜨거운 신생(新生)의 체험을 한 웨슬리(John Wesley)의 고백이 그것이다. 웨슬리는 그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신앙 각성운동을 전개하였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그 운동은 감리교(Methodist)운동으로 불려져 오늘의 세계 3대 개신교의 하나로 감리교회가 자리잡게 되는 역사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상하게 내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 믿어야 함을 느꼈다. 그리고는 내 모든 죄가 사라지고 나같은 죄인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속함을 받았다는 확신이 생겼다."
감리교의 역사는 위의 고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영국 런던의 올더스게잇 조그만 집회에 참석했다가 뜨거운 신생(新生)의 체험을 한 웨슬리(John Wesley)의 고백이 그것이다. 웨슬리는 그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신앙 각성운동을 전개하였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그 운동은 감리교(Methodist)운동으로 불려져 오늘의 세계 3대 개신교의 하나로 감리교회가 자리잡게 되는 역사를 이루게 된 것이다.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의 전통있는 성직자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는 3대째 성공회 사제였다. 그가 엡워드(Epworth)에서 출생했을 때 부친은 그곳 사제로 봉직하던 중이었다. 그의 어머니 수산나의 경건주의 신앙은 어린 그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엄격한 신앙훈련, 규칙적인 생활은 어머니에게서 받은 영향이었다. 그가 가족의 전통을 이어 동생(Charles)과 함께 옥스퍼드 대학생들로 1729년 11월 '신성구락부'(Holy Club)을 만들어 규칙적이고 엄격한 신앙훈련을 추구한것도 그러한 신앙의 연장이었다. 그들의 엄격한 규칙생할을 보고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 별명처럼 붙여준 칭호, '메도디스트(Methodist : 규칙주의자란 뜻으로 '융통성이 없는 자들'이란 비난의 의미도 담겨 있다)가 결국 교회명칭이 되었다. '메도디스트'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감리교'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감리교의 결정적 출발은 1738년의 중생 체험에 있었지만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729년의 신성구락부에까지 소급할 수 있고 또다시 웨슬리 가문의 철저한 경건주의 신앙전통을 세운 어머니 수산나의 신앙까지 언급할 수 있다.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1729년 성공회 사제가 된 후 아버지가 목회하던 엡워드에서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동생과 함께 미국 대륙 인디언 선교사로 가게 된 것도 어려서부터 받아온 경건주의적 신앙 열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1736년 미국 조지아에 도착하여 인디언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펴고자 했으나 당시 상황은 그에게 불리하기만 했다. 영국 정부와 식민지 정부 사이에 마찰이 야기되고 있었고 조지아의 백인들은 웨슬리의 금욕주의적 신앙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는 결국 2년만에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영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것은 실패와 좌절의 체험이었다. 나름대로 엄격하고 규칙적인 신앙생활을 추구하며 도덕적 선을 이루려 노력했던 그였기에 선교 실패의 체험은 깊은 좌절을 맛보게 하였다.
그러나 미국행이 전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였다. 자신의 의지적 노력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다는 점에서 값진 체험을 한 것이다. 의지적 노력으로 선을 추구하면서 율법주의적인 규칙적 금욕생활로 구원을 성취하려 했던 신앙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바로 이같은 한계 인식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라는 개신교의 보편적 구원 체험의 전제였다는 점에서 웨슬리의 프로테스탄트적 회심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또 한가지 미국여행에서 얻은 소득이 있다면 모라비안(Moravin)교도들과의 만남을 꼽을 수 있다. 모라비안교도란 14세기 유럽의 보헴아 지방에서 형성된 반(反)카톨릭적 신앙 공동체에서 비롯된 교파로 모라비아 지방에서 성행하다가 17세기 대륙에서 추방되어 그 중 일부가 영국에까지 건너와 독자적인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던 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이 규정한 최소한의 직제만 인정할뿐 카톨릭교회의 복잡한 교회조직은 부인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개신교회 보편적 구원론을 갖고 있었으며 공동체 생활을 통해 신앙적 결속을 다졌다. 모라비안교도는 루터의 종교개혁(1517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영국에서도 종교개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웨슬리는 미국으로 여행하던 중 모라비안 교도들이 심한 풍랑중에도 동요하지 않고 평화롭게 예배드리는 모습에서 우선 깊은 감명을 받았고 조지아에 가서도 그곳 모라비안 지도자 볼러(P.Bohier)와 가깝게 지내면서 모라비안 교도들의 신앙에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 그가 회심한 체험한 직후 모라비안교도들의 신앙에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 그가 회심을 체험한 직후 모라비안교도들의 중심지인 헤른후트를 방문한 것도 모라비안 교도 신앙이 그에게 끼친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새로운 신앙각성 운동으로 시작된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은 처음부터 별개의 교파를 만들고자 한것이 아니였다. 웨슬리가 소속된 영국 성공회 범주 안에서 성서적 신앙 운동으로 추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영국 성공회는 이 신앙운동을 흡수할 만한 개방적 자세가 되어있지 못했다. 권의주의적이고 제도적인 성공회는 웨슬리의 신앙운동을 경계하며 교회 제도권밖으로 내몰았다. 성공회 교회 안에서 선교를 하지 못하게 했음은 물론이고 각 교구마다 그의 출입을 금지 하였다. 이에 웨슬리의 유명한 "세계가 나의 교구다" (The world is my parish)라는 선언이 나오게 된것이다.
초기엔 주로 탄광촌, 농어촌, 같은 소외된 지역을 순회하며 옥외 전도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웨슬리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로 브리스톨, 킹스우드, 바드 페터레인, 런던 등지에 별도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 모임에 '감리교회'란 칭호가 붙여진 것은 1740년 7월 24일 '런던감리교회'(The Methodist Society in London)가 처음이었다.
초기 감리교 공동체 '신앙의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속회활동이었다. 웨슬리는 각 지역에 있는 감리교인들의 싱앙훈련 및 지도를 위해 교회마다 반회<(斑會)Band>를 조직했다. 남?녀로 나누어 남자반, 여자반을 지도하였다.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 서로간의 영적 신앙상태를 점검하고 교인간의 어려운 형편을 돕게 하려는 것이 반회의 목적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교인수가 늘고 웨슬리가 직접 반회를 지도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좀더 확대된 형태의 속회(屬會, Class Meeting)가 조직되었다.

1742년 브리스틀에서 처음 시도된 속회는 10~12명의 교인들로 구성되었으며 각 속회마다 속장(屬長, Class Leader)을 두어 속회를 인도하였다. 속장은 매주 1회 모이는 속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는 외에 속회 때마다 1인당 1페니씩 내는 헌금을 모아 구제사업과 복음전도 사업에 쓰는 일을 맡아 하였다. 그리고 매 3개월마다 한번씩 속장과 교인들이 함께 모여 집회를 가졌는데 첫째날 저녁엔 남자, 둘째날 저녁엔 여자 집회가 각각 열리고 셋째날엔 함께 모여 예찬식(Love Feast : Agape)으로 불리는 만찬을 나누었다.
신앙훈련과 성도간의 교제를 목적으로 한 이 예찬식은 동방정교회와 모라비안교도들 사이에 전통의식으로 전해오던 것으로 웨슬리도 이 전통을 받아들여 실시하였던 것이다. 빵과 음료수를 나누며 찬양과 기도, 권면의 설교로 이루어지는 이 의식도 초기 감리교 신앙공동체의 특징중 하나였다. 이처럼 매 3개월마다 한번씩 1년에 네 차례 모이는 규모가 커지면서 구역별로 속장들이나 권사(勸士, Exhorter), 전도사들이 대표로 모이는 모임으로 변하였고 교회의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는 의결기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 모임을 구역회(區域會, Circuit Meeting)혹은 계삭회(季朔會, Quarterly Meeting)로 불리었다.
매 계삭(3개월)마다 모였다 해서 계삭회라 하였다. 이 구역회(혹은 계삭회) 대표들이 1년에 한 차례씩 지방별로 모인 것이 지방회(地方會, District Conference)이다. 그리고 지방회 대표들이 역시 1년에 한차례씩 모인 것이 연회(年會, Annual Conference)로 ㅇㄴ회가 감리교회의 실질적인 최고 의결기구이다. 첫 감리교 연회가 소집된 것은 1744년 6월 25일 런던이었는데 이때 감리교회의 기본적 교리와 장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연회이상의 조직으로 총회(總會, General Congerence)가 있으나 이것은 미국 감리교회에서 생겨난 것으로 연회간의 사무협조를 목적으로 한 협의기구 성격이 강하다.
마지막으로 초기 감리교의 제도적 특징의 하나를 더 든다면 평신도의 역활이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속회도 평신도 중심으로 구성 유지되었을 뿐 아니라 평신도에게 설교권을 과감하게 부여하였다. 감리교 특유의 평신도 직책인 '권사'는 '권면'하는 자격, 즉 설교권을 과감하게 부여된 직책이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권사는 성경을 해석하여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들이었다. 또 다른 감리교 특유의 직책인 전도사(Preacher)도 본래 평신도 중에서 교인들의 신앙을 전담하여 지도하는 목회자에게 붙여주었던 칭호였다. 다시 이들 전도사는 한 곳에 정착해 시무하는 본처 전도사(本妻傳道師, Local Preacher)와 이곳 저곳 순회하며 시무하는 순행전도사(巡行傳道師, Itinerating Peracher)로 나뉘는데 오늘에 와서 본처전도사는 '장로(長老, Elder)란 말로 바뀌었다. 이들 전도사는 안수받은 목사(牧師, Pastor)와는 성례(성만찬과 세례의식)를 집행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감리교가 평신도의 비중을 높게 두는 전통은 모든의회 대표를 선출할 때 성직자와 같은 수로 평신도 대표를 선출하는 규정에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신생에 대한 웨슬리의 뜨거운 체험에서 시작된 감리교회 운동은 영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확산되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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